카테고리 없음

1. 이사를 했다 (#201227)

주간일기 2020. 12. 27. 19:35

https://youtu.be/6bXSNuMyEN4



1 이사를 했다
(2020년 12월 27일)

집이 위치했던 골목길

 

골목을 돌아돌아
언덕 끝자락에 있는 집에 도착할 때면
진이 빠져서 가만히 십분은 앉아있어야 했다

연식이 된 집에 대한 보상으로
키가 큰 친구들과 벽지를 새로 하고
따뜻한 조명을 두었다
그리고 우리 집은 마치 비밀의 다락방 같은 것이라고
생각하며 매일 언덕을 올랐다

-

화장실


2년 반동안 내가 살았던 집의 화장실은
콘테이너 박스로 확장된 공간이어서
겨울만 되면 온도차 때문에 천장에 물방울이 맺혔다
화장실에 있다가 그 기분나쁜 물방울을
어쩌다라도 맞게되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

-

디아블로 와인을 즐겨 마셨다
가끔 혼술하고 가끔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


가장 좋아했던 순간은
노란 조명 아래 혼자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
가장 좋아하는 안주를 먹으며
스크랩해둔 영화를 보는 것
영화가 끝난 뒤에는 나혼자 산다 같은 예능이나
봄밤 같은 드라마를 보았다

영화를 보고나서 메모장에 옮긴 기록


가장 속상했던 순간은
내가 감당 못할 짐들을 들여놓고 치우지 못해서
막상 엄마와 언니가 집에 와 대청소를 맡은 때.
아무 말 하지 않는 가족을 보며
속상하면서도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.



—-

처음 이사하고 집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던 때,
아마 2개월 쯤 지나서인가.

난생 그렇게 큰 바퀴벌레는 처음 보았다
내 집은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라는
믿음이 흔들렸다.
내가 정성들여 꾸민 집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.
내가 잠들었을 때
바퀴가 돌아다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.

집을 자세히 보면 바퀴가 나오는 통로를 모조리 막아놨다



바선생님과 조우할 때
내가 그렇게 난폭한 언어를
몇 분동안 내뱉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

인상깊은 바퀴는
과제를 하던 중 공상에 잠겨
벽지를 보고 멍때리다가 만난 바퀴
(이날 저녁 아빠에게 전화해서 펑펑 울었다)

그것 말고도아침에 양치 중에 만난 바퀴..
..굳이 이 기억들을 다시 짚진 말아야겠다

바퀴벌레는 분명 어딘가에 있다
하지만 괜찮다
내 눈에 띄지만 않고 조용히 공생하보자꾸나
이건 분명, 2년 전 나는 생각치도 못했을 마음가짐이다

-


어쨌든 나는 이 집을 떠나게 되었다

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 머문 곳을 떠나려한다고 했었나..
소설 <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>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

첫번째 집은 온통 도배된 흰 벽지가 싫어서,
좁은 공간이 싫어서 도망쳤고
두번째 집은 가정집같이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서
괜찮은 기억으로 남아있다.

이번에 이사를 할 때 짐이 참 많았는데
예전 자취방에서 느꼈던 공허함과 차가움을 지우려고
낡고 더러운 집을 아닌 것 처럼 만들려고
애쓴 흔적이 아닐까 한다.

나의 첫 자취방. 열심히 꾸며도 집의 차가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.
그리고 변기와 벽이 가까워서 변기에 가로로 앉아야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.
두번째 집에 처음 갔을 때. 집 컨디션과 평수를 맞바꾸는 선택을 했다.


—-

나는 어쩌면 대학생이라는
월세방을 찾아 2년마다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분을
잘 이용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

행복하지 않아도 포기할 수 없는 장소에서
참고 이겨내고 계속 머물러야 하는 부담이 없다
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


꼭 넣고 싶었던 이사날 짜장면 사진
집에 가는 길 종종 마주친 고양이


내가 생각보다 많은 물건을 관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았다
다음 집에서는 물건을 많이 줄여야겠다고 생각한다
나 답게 게으르고
나 답게 불꽃처럼 타오르다가
한 순간 꺼져서 쓰러지길 반복했던
나의 대학 시절은
이 집과 따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